2016년 8월 19일
[소금과 빛 복음캠프 섬김이 모임 메시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헤브론 원형학교 졸업을 앞둔 즈음 선생님은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단기선교 2년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오라고. 다른 어떤 것보다 비중 있게 기도하며 주님께 구했고, 우리 모두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이를 적어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 표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시편 131편은 김지산 선교사를 택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그들이 순종하는데에 성공해서 잘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들을 선택하셨고 끝까지 이끌어가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느헤미야 1장 9절이 느헤미야를 선택하셨고 출애굽기 19장 4절 말씀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사도행전 9장 15절 말씀이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이 여기 소금과 빛 복음캠프를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처음부터 복음이 부끄럽지 않았다면 굳이 그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우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기 부인에서부터 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놀라운 메시지이며,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때가 바로, 복음을 부끄러워 할 때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첫 번째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동시에 나 자신을 복음보다 높게 여기는 태도가 됩니다. 그 때에는 복음의 가치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그 때에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계획, 자신의 느낌과 욕심이 더 중요해집니다.
저도 아직 아는 것이 없고 어리지만, 제 편에서도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정말로 힘들만 해서 힘든 시간이라기 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만 자기를 내려놓으면 되는데, 나만 자기를 부인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그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가치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 가치를 모를 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때에는 자연스레 나 스스로를 높이게 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둘째로, 걱정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부끄럽다는 의미는 단순히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제게 메시지를 준비하며 가장 저를 괴롭히는 장애물이 한 가지 있었다면, 바로 걱정이었습니다.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내 말이 의미있게 다가올까? 다 지루하게 들리진 않을까? 이러한 걱정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담대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걱정이 앞서고 염려가 앞섭니다. 부끄러운 데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렇게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때에 한국에서 온 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헤브론에 있을 적 담임선생님에게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편지에는 익숙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다! 잘해도 은혜요, 망해도 은혜다! 그러니 염려말고 당당해라!"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도 결국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비로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에겐 한 가지 태도가 요구됩니다.
저는 약속의 말씀인 로마서 1장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 듯한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말씀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저는 이 표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를 빚졌다고 말하지? 차라리 그들에게 "너희는 복음이 필요한 죄인들이야, 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너희는 빚진 거야." 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그들에게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중, 주님은 제게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보게 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고 그렇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는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의 친구들은 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여 말이 많아지기 때문이죠. 그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비중은 그냥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수준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복음은 그들이 듣고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빚진 자 된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맡은 자들은 마땅히 세상에 빚진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있는 자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을 듣기 원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상실한 마음 가운데 버려져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역겨워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러분, 빚진 자의 태도로 일어섭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지 압니다. 소망 없는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무슨 자격이 있거나 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말씀에 우리를 의탁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소금과 빛 캠프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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