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8.2 고전6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묵상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의견 차이가 생겼다.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행동은 다름 아닌 법정에 소송하는 것이었다. 일상의 일과 관련하여 벌어진 다툼을 그들은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서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한 것이다. 

바울은 이 일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 고린도 교인들을 강하게 질책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있다. 성도들은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심지어 천사들마저도 심판하리라고 말한다(고전6:3).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 바로 교회요 성도들인데, 서로 일어나는 분쟁 마저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지혜롭게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로 그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었다. 그것은 실패였다. 그것마저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냐. 차라리 속아 넘어가 줄 수 없는 것이냐.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군가를 옳다 그르다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맡았고 참된 의로움과 정의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옳으며 그른지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게으름이며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더욱 깊고 심오한 자세, "사랑"이다.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판단할 권리가 있기 전에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니 나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에 있는 의의 잣대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주님을 위해 산다면서 이것도 못해줘?"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거야?"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사 내 눈에 지체의 행동이 옳지 않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를 마음에 품고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심판할 수 있는 권리를, 주님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한 것을 당해주라는 것이다. 차라리 속아 넘어가 달라는 말이다. 그것이 참된 앎이다. 그것이 겸손의 자리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아름답고 거룩했던 자들의 모임이 결코 아니다. 음행과 우상 숭배, 간음과 동성애, 도둑질과 탐욕 등과 같은 더러움 가운데 살던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다. 내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선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고전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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